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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면 위로 비치는 신라시대의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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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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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내권 |
 | 지정번호 | : | 사적 제18호 |
 | 영업시간 | : | 09:00~22:00 |
 | 휴무일 | : | 연중무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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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해전은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 "안압지의 서에는 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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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받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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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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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내권 |
 | 지정번호 | : | 국보 제31호 |
 | 영업시간 | : | 동절기 : 09:00~21:00하절기 : 09:00~22:00 |
 | 휴무일 | : | 연중무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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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天文臺)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첨성대(瞻星臺)처럼 논란이 많은 문화재도 없다. 그것은 첨성대의 쓰임에 관한 이견 때문인데, 어떤 이는 천문관측대였다고 하고, 나침반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다고도 하며, 또한 천문대의 상징물이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첨성대의 의의는 그 자체가 매우 과학적인 건축물이며 돌 하나하나에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을 터이다. 전체적인 외형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사각형의 2중 기단(基壇)을 쌓고 지름이 일정하지 않은 원주형으로 돌려 27단을 쌓아올렸으며, 꼭대기에눈 우물정(井)자 모양으로 돌을 엮어놓았다. 각 석단(石壇)의 높이는 약 30cm 이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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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를 대표하는 고분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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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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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내권 |
 | 휴무일 | : | 연중무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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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내 평지 고분군(平地 古墳群) 가운데 서남쪽 부분으로 20여기(餘基)의 대소(大小) 고분이 남아 있다. 그중 전 미추왕릉(傳 味鄒王陵)을 중심으로 밀집 분포된 18기(基)의 고분들은 1973년 대릉원(大陵苑)이라 이름 붙여진 고분공원(古墳公園)으로 조성되었다. 지상에 봉우리가 솟아 있는 고분들은 외형상 모두 봉토분(封土墳)으로 되어 있으며 단독의 원형분(圓形墳)과 함께 표형쌍분(瓢形雙墳)도 있다. 이 고분들은 대부분 고신라(古新羅) 특유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된 109호분에는 순차적으로 조성된 3개의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가 있었고 그 가운데 먼저 아래에 만들어진 매장주체부(埋葬主體部)는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고신라 적석목곽분(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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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의 역사를 볼 수 있는 박물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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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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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내권 |
 | 영업시간 | : | 09:00~18:00 (토요일·공휴일은 1시간 연장), 09:00~21:00(3월~12월 중 매주토요일) |
 | 휴무일 | : | 휴무일 : 매년 1월 1일, 매주 월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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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경주시민의 요청에 따라 출발한 경주신라회가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로 정식 발족하면서 신라의 문화유적 보존을 위해 경주시 동부동에 있던 옛 객사 건물에 전시관을 개설하여 신라문화재를 일반에게 공개함으로써 박물관의 기능이 시작되었다. 1921년에는 금관총 조사를 계기로 경주시민들은 "금관고"라는 건물을 마련하여 여기에 출토품을 전시 보관하였으며, 해방 후 서울의 총독부박물관이 국립박물관으로 정식 개관되자 경주도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편제가 정비되었다. 이 때까지 동부동에 자리잡고 있었던 옛 박물관은 1,200여 평의 터에 몇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아담한 박물관이었다. 그 뒤 우리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높아지면서 경주지역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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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화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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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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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내권 |
 | 지정번호 | : | 사적 제21호 |
 | 영업시간 | : | 동절기(09시~17시), 하절기(09시~18시) |
 | 휴무일 | : | 연중무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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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이다. 김유신(595∼673)은 삼국통일에 중심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와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여러전투와 내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귀족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8년에는 신라군의 총사령관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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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와 자장스님의 법열이 느껴지는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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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황사는 신라 27대 선덕여왕(善德女王) 3년(634) 춘(春) 정월에 창건되었으며 신라 경도(京都)내 7가람 중의 하나이다. 35대 경덕왕(景德王) 14년(775)에 약사동상(藥師銅像)을 조성하였는데 장인은 본피부(本彼部)의 강고내말(强古乃末)이었다. 분황사는 임진왜란시에 소실되어서 후에 작게 만들었다고 한다. 경내에 화쟁국사비귀부(和諍國師碑龜趺), 모전석탑(模塼石塔), 석정(石井), 석조(石槽), 초석, 석등 대석 등이 남아 있으며 절의 남쪽 바깥에는 당간지주가 있다. 현재 보광전(普光殿)이라는 작은 법당이 있으며 안에는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1976년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사내 일부를 발굴 조사하였다. 분황사는 우리 민족이 낳은 가장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살다 간 곳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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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 최대의 가람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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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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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내권 |
 | 지정번호 | : | 사적 제6호 |
 | 휴무일 | : | 연중무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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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皇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근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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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영원한 궁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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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는 토함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앞은 넓은 조양평야를 건너 남산이 마주 보이는 곳이다. 신라 법흥왕 22년(535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후대에 여러 번 중수를 하였으나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시에 전부 소실되고 다만 석조물과 동불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효종 10년(1659)에 일부 중건하였고 1924-1936년 사이에도 여러번 중수하였다. 1970-1973년 사이에 유지만 남아 있는 곳에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회랑 등을 복원하였다. 현재 경내에는 자로문, 범영루, 경루, 다보탑, 석가탑, 석등, 봉로대, 대웅전, 무설전, 안양문, 관음전, 비로전, 간주, 석조, 석부도, 석등 등이 남아 있다. 삼국이 통일되어 나라가 안정되고 모든 문화가 골고루 발달하던 시기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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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미술의 백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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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암은 통일신라 경덕왕(景德王) 10년(751)에 재상 김대성(金大成)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토함산의 동쪽 봉우리 아래에 동남향하여 동해를 마주하고 있는데 석벽의 석재를 짜맞추어 인공석굴을 만든 것으로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을 본뜬 것이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석굴은 전방후원의 형식이고 원형주실과 방형전실, 간도(間道)로 구성되어 있다. 주실은 구릉형으로 그 위에 봉토로 덮었으며 전실에는 원래의 지붕이 없어져 1963년 목조건물을 새로 덮었다. 굴 중앙에는 높이 3.48m의 석가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고 전실과 굴 입구 좌우 벽에는 팔부신상, 인왕 및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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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적인 규모의 종합관광단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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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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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관광단지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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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보문 관광단지는 유적의 도시 경주에 다양한 휴식공간을 제공하는 종합관광휴양지이다. 이 보문 관광단지가 있는 보문동은 예전에는 경주군 내동면 지역으로 보문사 절이 있던 곳이다. 현재 절은 없어졌으나, 보물 제64호인 보문리 석조와 보물 제123호인 당간지주가 있고 1959년에 축조한 보문 저수지가 남아있다. 아름다운 보문 호수를 중심으로 총 3백 21만평을 종합관광 휴양 시설로 개발하여 만든 곳이 바로 이곳 보문 관광단지이다. 거대한 전통 물레방아와 높이 12미터의 국내 제일의 인공폭포가 그 웅장함을 드러내고 있는 입구를 따라서 가면 보문호를 중심으로 경주에서 유일하게 인위적인 위락 시설과 고급 호텔들이 줄지어 있다. 경주 보문단지는 경주 현대호텔을 시작으로 콩코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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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세계를 잇는 세계문화엑스포공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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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내용 1. 영 상: 사이버영상관 2. 전 시: 문화이미지전, 동방문화관, 人과仁 특별전,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전, 한국의 벼루전 3. 공 연: 화랑극장, 백결공연장(국내.외 예술공연) 4. 체 험: 사이버캐릭터관, 컴퓨터게임관, 천축국대탐험 5. 특별이벤트 *공원운영 : 휴일없이 연중운영(동절기 휴장)하며, 개장시간은 10:00부터 폐장시간은 18:00까지이다. *성수기와 비수기로 구분하여 신축적으로 운영함 *세계최대의 사이버영상관에서 "천년 전 신라로 시간여행을!" 2001년 3월 30일부터 문화테마공원으로 상시개장하고 있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에서는 최고의 하이라이트로 자랑하고 있는 사이버영상관의 콘텐츠를 2000년 행사 후 계속 향상시켜 기존의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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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경주 속 신라의 향기를 느낄 수 있는 한 폭의 그림같은 역사문화체험마을! 경주시 보문단지 4,000여평 부지에 신라의 옛 모습이 그대로 옮겨진 듯한 신라 밀레니엄 파크는 1,000억원을 틀여 신라가 가장 부흥했던 8세기 때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 초대형 특수효과 공연 및 마상무예 스턴트 공연이 함께하는 다이나믹한 역사문화체험 마을로 판타지, Interactive Attraction, 교육성, 고증성을 두루 갖춘 신라밀레니엄파크는 복합 체험형 역사 테마파크로 가족과 함께 친구와 함께 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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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관광단지의 각광받는 명소의 하나인 경주월드는 8만평의 대지에서 다양한 이벤트 행사, 신나는 놀이시설, 수영장, 눈썰매장, 물보라썰매장 등이 펼쳐지는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온가족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에 더 없이 좋은 공간이다. 대규모 투자예산으로 국내 최고 높이인 70m의 메가드롭과 국내 최대 스릴 기종 토네이도, 영남 유일 그랜드 캐년 대 탐험 그리고 피터팬, 날으는 잠수함 등 대규모 놀이기구를 유치하였고 2007년에는 단일 기종 사상 최고액인 150억원을 투자하여 국내최고의 롤러코스터를 선보이는 등 타 공원과 차별화에 역점을 두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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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권 최대 4계절 워터파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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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권 최대 4계절 워터파크!
블루원 워터파크는 남태평양의 폴리네시안을 테마로 전체 12,000평부지에 실내 2,000평, 실외 8,500평, 광장 및 주차장 1,500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하루 최대 10,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영남권 최대 규모를 자랑합니다.
다양한 물놀이 시설과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사계절 내내 건강하게 워터파크의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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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계승하는 장인들의 마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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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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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사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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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토함산(吐含山)기슭의 경주민속공예촌은 조상(祖上)의 혼(魂)과 예(藝)가 깃든 민속공예품(民俗工藝村)을 재현하여 장인정신(匠人精神)의 맥(脈)을 이어가는 곳이다. 이곳에는 금속(金屬), 도자(陶瓷), 목공(木工), 보석(寶石), 자수(刺繡), 죽세(竹細) 등 19개 업체의 공방(工房)이 자리잡고 있으며 향토자료관(鄕土資料館)과 공예품(工藝品) 전시판매장도 별도로 마련되어 있다. 경주민속공예촌(慶州民俗工藝村)은 공방을 개방하고 있어 관광객이 공예품 제작과정을 관람할 수 있으며, 기념이 될 공예품을 그 자리에서 직접 구입할 수 있다. 전통의 얼과 멋, 솜씨를 계승하는 장인들의 마을로, 전통 기와집과 초가집이 40여 동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라시대의 공예 기술을 보존하고 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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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대표적 사설 미술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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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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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관광단지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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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의 보문단지 내 호숫가에 위치한 아트선재미술관은 1991년 5월 18일에 개관하였다.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에 설립된 아트선재 미술관은 고대 문화와 현대 미술이 조화를 이루며 상호 공존할 수 있는 문화적 초석을 다지는 데 기여하고, 지역사회의 미술 발전은 물론 전반적인 문화 예술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대우개발 정희자 회장의 개인 소장품을 기반으로 설립된 이 미술관은 미국 유학 중 사망한 설립자의 장남 김선재씨를 기리는 의미에서 아트선재 미술관이라 명명되었다. 국내의 유수한 현대 미술 작품을 소장하고 있는 아트선재미술관은 소장품을 비롯한 미술 작품을 소개하고 전시하며 다양한 문화 행사를 주관하는 등 종합적인 지역 문화 공간으로 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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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천년의 역사와 함께한 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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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낭산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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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은 주로 천마총을 비롯하여 불국사, 석굴암, 박물관 등을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진 관광지를 둘러보고 난 후 경주를 논한다. 물론 많이 알려진 것이 유명하고 중요한 문화 유산임에는 틀림업지만 경주를 더욱 깊이 알려면 신라의 혼이 살아 숨쉬는 경주남산을 한번쯤은 올라갔다 와야 한다. 경주남산은 서라벌 남족에 우뚝 솟은 해발 468m의 금오산과 494m의 고위산에서 뻗어 내린 약 40여개의 등성이와 골짜기를 말하며 180여개의 봉우리가 있다. 온 산 넓게 퍼진 자락마다 아득히 먼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는 흥망성쇠의 유서 깊은 역사와 간절한 전설이 서려있고, 때로는 젊은이의 심신 수련장이었으며, 나라를 지키는 산성이 되기도 하고, 백성들의 영험있는 신앙지이며, 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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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왕실의 제의와 연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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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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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낭산권 |
 | 지정번호 | : | 사적 제1호 |
 | 영업시간 | : | 하절기 : 09:00~18:00,동절기 : 09:00~17: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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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에 의하면 포석정은 임금의 놀이터로 쓰이던 이궁(離宮)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 지금 이궁은 없어지고 전복모양의 석구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석구가 유상곡수(流觴曲水,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잔이 자기 손에 닿으면 詩를 짓는 놀이)의 잔치를 베풀었다는 곳이다. 이곳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으로 『삼국유사』에 헌강왕과 연관된 이야기 속에서 보인다. 혼강왕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함께 향연을 베풀고 있을 때 남산신이 왕 앞에서 춤을 추었으며 왕은 신이 돌아간 후 신하들 앞에서 그 춤을 흉내내어 보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춤을 어무상심무(御舞詳諶舞)라 하였다고 한다. 창건연대는 미상이고 석구의 폭이 평균 약 31㎝, 깊이가 약 22㎝, 총 길이는 22m 정도이다.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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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난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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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낭산권 |
 | 지정번호 | : | 사적 제24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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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거세의 탄생지로 알려지고 있는 나정은 혁거세의 능으로 전해오는 오릉(五陵)과 인접하여 있다. 사실여부의 문제는 접어두고 이들의 실체를 모두 인정할 경우 탄생과 죽음이 모두 동일한 공간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릉사거리에서 경주시 내남면으로 진입하는 35번 국도를 따라 남으로 내려가다 300~400m 정도 가다보면 좌측으로 하여 남간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이 길은 양산재,신라 제7대 일성니사금의 능, 남간사지, 천은사지, 창림사지등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입구에서 동으로 보면 낮은 구릉지대에 송림이 울창한 공이 보인다. 그곳이 사로국의 개창자인 혁거세가 탄생한 곳으로 전하는 나정이라는 우물이 있는 곳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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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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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낭산권 |
 | 휴무일 | : | 연중무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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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역사적 성업을 완수한 태종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장군의 업적을 길이 찬양하고 화랑의 호국정신을 오늘에 이어받아 발전하는 조국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자 이 곳에 통일전을 조성하였다. 통일전에는 태조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장군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고, 회랑에는 삼국통일의 기록화가 전시되었다. 경역에는 삼국통일기념비와 태종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장군의 사적비가 서 있다. 통일전은 모두 콘크리트식 건물위에 기와를 이어놓은 전형적인 그 시절의 건축양식으로 지어졌으며 인공연못 및 주차장 시설 등의 부대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호국영령의 뜻을 기리자는 뜻인 만큼 초,중등학생들의 이념교육장 형태로 이용되고 있으며 수학여행의 필수코스인듯 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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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지왕의 목숨을 구한 편지가 나온 연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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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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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낭산권 |
 | 지정번호 | : | 사적 제138호 |
 | 영업시간 | : | 24시간 |
 | 휴무일 | : | 연중무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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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21대 소지왕(488) 정월 보름날, 명활산성에서 옛 궁성이던 월성으로 대궐을 옮겨 놓고 신하들을 위로하기 위해 천천정에 행차하였다. 임금과 신하들이 거나하게 취하여 있을 때, 한 마리의 쥐가 상 밑으로 기어들고 한 마리의 까마귀가 나뭇가지에서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임금은 음식이 있는 곳에는 으레히 오는 짐승들이라 고기를 집어 쥐에게 던져 주었다. 고기를 받아먹고 쥐가 사람처럼 말했다. “임금님, 저 까마귀 가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시오.”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임금은 그제서야 쥐가 나타난 일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 날쌘 장수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 가게 하였다. 까마귀는 동남 산으로 날아갔고, 장수는 까마귀의 뒤를 따라갔다. 까마귀는 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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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의 호국정신이 깃든 바다무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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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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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권 |
 | 지정번호 | : | 사적 제158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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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북면 봉길리 해변에서 약 200m 떨어진 바다중에 문무왕의 유골을 화장한 뒤 뼈를 뿌린 곳으로 알려진 대왕암이 있다. 문무왕은 "죽어 동해바다의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겠다."며 죽은 후 화장을 해서 뼈를 동해에 뿌리고 장례절차는 검소하게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아들인 신문왕은 그 유언을 따라 동해 중에 있는 바위에 유골을 뿌렸다고 하는데 신라에서 불교식 화장을 한 최초의 기록이다. 멀리서 보는 대왕암은 평범한 바위섬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바위 한가운데가 못처럼 패어 있고 둘레에 자연암석이 기둥 모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진 모습이다. 한 변의 길이 약 3.5m 되는 못 안에는 거북이 등 모양의 길이 3m, 폭 2.2m의 돌이 얹혀져 있다. 못 안의 물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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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었다는 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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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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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권 |
 | 지정번호 | : | 사적 제3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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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이 아버지 문무왕(文武王)의 뜻을 받들어 즉위한 이듬해(682)에 완공하고 감은사(感恩寺)라고 불렀다. 1959년 발굴조사에 의하면 중문(中門)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기단석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초석이 놓인 자리만 확인되고, 금당(金堂)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기단은 이중기단이다. 북쪽에는 기단석과 계단석이 남아 있다. 금당의 바닥은 방형대석을 이중으로 놓아 위쪽 대석위에 장대석을 걸쳐놓았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치 마루를 깔 듯이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았다. 이 마루 장대석 밑은 공간이 된 특수한 구조로 다른 예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동해의 용(龍)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한 것 같다. 강당지(講堂址)는 정면 8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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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암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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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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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권 |
 | 지정번호 | : | 사적 제15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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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왕암을 의미 있게 눈여겨 볼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다. 대본초등학교 앞쪽에 있는 이견대와 동해구(東海口)라는 표지석 아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서 있는 자리이다. 이견대는 화려한 능묘를 마다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였다는 곳이며, 그의 아들 신문왕이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배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유서 깊은 곳이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 발굴조사 때 드러난 초석에 근거하여 최근에 지은 것이다. 동해구 표지석 아래로 내려가면 우현 고유섭 선생의 반일 의지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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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일대를 관장하던 최대의 사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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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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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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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림사는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 함월산(含月山) 기슭에 있는 사찰이다. 창건 연대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선덕여왕 20년(643)에 원효대사가 중창하면서 기림사라 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천축국(天竺國, 인도)의 승려 광유(光侑)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 불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31대 신문왕이 동해에서 만파식적을 얻어 가지고 왕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기림사 서편 시냇가에서 잠시 쉬어갔다."는 기록이 있어 통일신라 초기 신문왕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 철종 14년(1863)에 대화재로 113칸의 건물이 불탔으나 1863년 경주 부윤 송우화가 시주하여 중수하였고 1878년에 중수를 거쳐 1905년 혜훈이 다시 중수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기림사는 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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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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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안권 |
 | 지정분류 | : | 보물 제58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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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굴사원은 인도나 중국에서 흔히 보이는 형식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형태이다. 가장 큰 이유는 자연환경 때문이다. 석굴을 조성할 정도의 대규모 암벽이 없고 또 단단한 석질의 화강암이 대부분이라 석굴이 생기기가 쉽지 않다. 불국사의 석굴암만 해도 자연석굴이 아니라 인공으로 만든 석굴이다.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함월산 기슭의 골굴암에는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회암에 12개의 석굴이 나 있으며, 암벽 제일 높은 곳에 돋을새김으로 새긴 마애불상이 있다. 조선시대 화가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이라는 그림을 보면 목조 전실이 묘사되어 있고, 숙종 12년(1686)에 정시한이 쓴 「산중일기」에 의하면, 이 석굴들의 앞면을 목조 기와집으로 막고 고운 단청을 하여 화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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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재 이언적 선생을 기리는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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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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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강/북부권 |
 | 지정번호 | : | 사적 제15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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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산서원(玉山書院)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을 봉향하는 서원(書院)으로 1572년(선조 5년)에 창건되었다. 이언적(李彦迪) 선생은 조선조의 성리학자(性理學者)로 도학으로 이름이 드높았으며, 동방오현의 한 사람으로 추앙되었다.옥산서원(玉山書院) 태극문(太極門) 안에는 임금이 쓴 글씨와 편지, 회재선생(晦齋先生)의 글씨, 퇴계선생(退溪先生)의 글씨를 비롯해서 「삼국사기(三國史記)」 완전 1질이 보관되어 있어서 학술연구(學術硏究)에 좋은 자료(資料)가 되고 있다. 옥산서원을 둘러본 뒤에 자계천을 따라 500m 쯤 더 올라가면 독락당(獨樂堂)(보물(寶物) 제413호)이다. 이곳에는 사랑채인 독락당(獨樂堂)과 ㅁ자형의 안채, 노비들이 거처하던 행랑채와 공수간(供需間:음식을 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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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유교문화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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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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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강/북부권 |
 | 지정번호 | : | 중요민속자료 제18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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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양동(良洞)마을(중요민속자료 제 189호)은 선조들의 체취와 삶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곳이다. 마을 뒤편 안강(安康)뜰의 생산력을 바탕으로 형성된 부촌의 영광이 5백년 묵은 기와집으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경주에서 경주(慶州)~포항(浦項)간 산업도로를 16km 쯤 달려가면 안강 평야 끝자락에 1백50여 크고 작은 고가와 초가집이 펼쳐진 부채처럼 소담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 중, 후기에 걸치는 다양하고 특색있는 우리나라의 전통가옥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고건축 전시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경주시 강동면 설창산(雪倉山) 기슭에 터를 잡은 양동마을은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亂)때 공을 세운 손소(孫昭/1433~1484)와 외손자인 유학자 회재(晦齋) 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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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이 모셔진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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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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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낭산권 |
 | 지정번호 | : | 사적 제18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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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능은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김백정)이 모셔진 곳이다. 봉분의 높이 7.6m, 지름 38m로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으로, 무덤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 몇 개만 드러나 있다. 이 능은 아무런 시설 없이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진평왕은 남산성(南山城)을 쌓았고, 명활산성(明活山城)을 개축하는 등 경주방위를 중요시하였다. 왕으로 있는 동안 고구려·백제와 싸움이 빈번했으며, 중국의 수(隋)나라·진(陳)나라·당(唐)나라와의 외교에 힘써 후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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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초의 여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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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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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남산/낭산권 |
 | 지정번호 | : | 사적 제18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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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능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년에서 647년. 김덕만)이 모셔진 곳이다. 경주시 동남쪽에 있는 낭산의 남쪽 능선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밑둘레 74m, shvdl 6.8m, 지름 24m되는 이 능의 겉모양은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며, 아랫부분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한 2~3단의 자연석 석축이 있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를 만들고, 분황사를 건립하였으며, 황룡사 9층 목탑을 축조하는 등 신라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또 김춘추, 김유신과 같은 인물들을 거느리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삼국유사에는 "왕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에 장사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말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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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 독특한 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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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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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강/북부권 |
 | 지정번호 | : | 국보 제4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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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정혜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1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1층 탑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큰 규모로 만들어진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사각형의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안에 다시 보조기둥을 붙여 세워 문을 만들어 놓았다. 이렇듯 문을 마련해 놓은 것은 열린 공간을 추구하고자 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고 있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조각이 아닌 별개의 다른 돌로 만들어 놓았고, 직선을 그리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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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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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분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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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강/북부권 |
 | 지정번호 | : | 보물 제41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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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은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이다. 이언적(1491∼1553) 선생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유서 깊은 건물이라고 한다. 조선 중종 11년(1516)에 지은 이 건물은 낮은 기단 위에 세운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집을 향해 오른쪽 3칸은 넓은 마루인데 앞을 모두 터 놓았으며, 왼쪽 1칸만 칸을 막아 온돌방을 만들어 놓았다. 그러나 원래는 맨 오른쪽 칸도 막아서 방으로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어, 대청은 가운데 2칸뿐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기둥은 둥근기둥을 세우고 대청 천장은 뼈대가 모두 노출된 연등천장이다. 독락당 옆쪽 담장에는 좁은 나무로 살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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